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뇌터 정리 (문단 편집) == 여담 == 뇌터는 1918년에 [[괴팅겐 대학교]]에서 이 정리를 증명했다. 당시의 사회는 [[성차별]]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에 [[다비트 힐베르트]]가 뇌터를 괴팅겐 대학교의 수학과 사강사[* privatdozent, 한국식으로 하면 시간강사 정도쯤 되는 위치인데, 당시 독일은 교수진 거의 대부분을 사강사로 채워서 사실상 지금의 조교수~정교수 정도의 위치이다.]로 초대하려고 했을 때 대학교의 남자 교수들이 "학생들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여자 교수에게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항의했을 때에 힐베르트의 답변이 걸작이다. >나는 그녀의 성별이 강사 임용에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곳은 대학교지 목욕탕이 아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1915년부터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모스크바 대학교]]에 초빙받는 1928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에서 일했다. 그런데 위의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괴팅겐 대학이었기 때문에 뇌터가 사강사로 임용된 것인데, 괴팅겐 대학교가 19세기 초반, 하노버 왕국의 국왕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에 대항에 자유주의 제도의 존치를 옹호하던 교수 7명이 파면되는 괴팅겐 7인 사건 등이 일어났을 정도로 다른 대학들보다 덜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괴팅겐 대학교에는 펠릭스 클라인, [[막스 보른]], [[폴 디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의 세계적 석학들이 몸 담고 있을 시기이다.[* 참고로 이들은 1933년 나치의 억압 정책으로 인하여 대부분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물리학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정리이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안타까움 뿐이다. 참고로 뇌터가 교직 생활을 하던 수학과 건물은 지금도 괴팅겐 대학교 수학과 건물로 쓰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